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의 그림 같은 도시 오슬로에서 에드바르 뭉크라는 예술가가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뭉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가장 영향력 있고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의 독특한 예술 표현과 인간의 감정에 대한 심오한 탐구는 예술계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예술가로서의 뭉크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비극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5살에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었고, 나중에는 사랑하는 누나인 소피도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유년 시절 이별과 상실감은 그의 삶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고 예술적 표현에 연료가 되며 일생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습니다.
뭉크는 오슬로의 왕립 예술 및 디자인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의 예술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는 운동인 인상파와 상징파의 작품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특히 잠재의식과 인간 마음의 내적 작용에 대한 상징주의자들의 탐구에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후 예술적 여정을 더 깊이 탐구하면서 다양한 예술적 표현기법을 실험하고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대담한 색상과 표현력이 풍부한 붓놀림을 사용했으며 종종 감정의 강렬함을 전달하기 위해 형태를 왜곡하고 과장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내면의 혼란과 실존적인 고뇌를 반영하는 영혼의 창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에드바르 뭉크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을 소개하며 오늘날에 그의 작품들이 의미하는 메시지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절규’를 언급하지 않고는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뒤틀린 얼굴과 귀에 손을 대고 있는 강렬히 기억되는 인물을 표현한 이 대표적인 작품은 오늘날까지 불안과 절망의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작품의 명확한 메시지는 뭉크 자신의 깊은 고립감과 그의 존재에 만연한 실존적 불안을 표현하려는 열망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빠르게 변화하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상호 연결된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은 압도적인 스트레스, 불확실성 및 고립감 그리고 정체성 혼란 등으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남성을 다리를 휘감은 열정적인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보입니다. 왼쪽의 천진함, 순결, 젊음을 상징하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성과 오른쪽에 슬픔과, 질투,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도 보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누이를 잃어가며 생과 사를 춤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양한 가족사, 혹은 연애사의 해석들이 있습니다. 저의 관찰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삶과 죽음의 상징하는 색과 남자와 여성들이 빙그르르 도는 듯한 춤 추는 순간을 통해 삶의 역동성과 그 끝이 아리게 느껴집니다. 인간 존재의 덧없음에 대한 뭉크의 집착을 반영합니다. 1899년대 말 끊임없는 변화와 쾌락 추구가 특징인 시대에 작업된 이 작품은 젊음의 무상함, 늙음의 필연성, 덧없는 쾌락의 본질에 대한 에드바르 뭉크의 메시지가 들려옵니다. 지금의 우리에게 그는 그의 아픔과 예술적 표현을 통해 현재의 순간을 포용하고, 삶의 변동 속에서 균형을 찾고, 인간 경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경직된 몸과 불안한 심리가 느껴지는 소녀가 벌거벗은 채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이 보입니다. 아이에서 여인이 되어가는 소녀의 모습과 그 뒤의 어두운 그림자 같아 보이는 검은 형상이 소녀와 대비되어 위태로워 보입니다. 순수함, 연약함, 성적 각성의 양면성이 혼합된 느낌을 받습니다. 성인기로의 전환과 인간 성의 복잡성에 대한 격렬한 탐구의 순간이 ‘사춘기’입니다. 요즘은 신체의 사춘기 기간을 넘어 성인기에도, 사회에도 정서적 성숙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 정체성, 성적 지향, 신체 긍정과 부정 평가 등을 사회의식에 대해 이 작품은 보다 포용적이고 온정적인 세상을 조성하는 데 있어 공감, 이해 및 수용과 인간의 보편성을 재고해 메시지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이 파격적인 묘사에서 뭉크는 여인의 이면을 마돈나와 메두사를 합성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타락한 이브와 모성을 가진 여성의 양면성을 담은 작품으로도 해석됩니다. 길쭉한 얼굴과 공허한 눈을 가진 우울한 마돈나의 모습을 묘사하며 구석에 분리되어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 작품에도 죽음, 슬픔, 인간관계의 연약함이라는 주제에 대한 뭉크 자신의 성향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여성성과 영성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의문을 들게 하는 이 작품은 전통적인 종교적인 개념을 다각도로 볼 수 있게 합니다. 성별 역할의 구분이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에 이 작품은 우리가 사회적 규범을 재고하고 생각해 볼 수 있게 자극합니다.
작품 ’재’에서는 뭉크의 파괴적인 첫사랑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재와 잔해들에 둘러싸여 가운에 서서 허탈한 얼굴의 여성과 좌측 하단 모서리에 몸을 웅크리고 좌절하고 있는 듯한 남성이 보입니다. 결혼한 여성과의 5년간의 사랑을 불태우고 재 만 남은 슬픈 엔딩의 정서적 잔해와 그의 상실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실패한 사랑의 여파와 남겨진 감정적 잔해를 담은 이 작품은 개인이 사랑, 친밀감과 연약함의 복잡성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뭉크의 상실과 슬픔의 묘사는 현재 우리의 아픔에도 공감과 치유를 보내며 관계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 주는 것 같습니다.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은 빈센트 반 고흐의 동일한 이름의 작품보다 앞서 작업된 작품입니다.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이 두 화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통과 아픔이 생의 여정에 깊게 자리하고 있는 점이 비슷합니다. 두 작가 모두 밤의 분위기에 사로잡혀 밤하늘의 묘사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심리적, 정서적 불안한 상태인 뭉크의 성향이 표현에 묻어나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는 다른 매력을 보여 줍니다. 이렇듯 밤 하늘은 두 거장에게 영감과 위로를 주는 순간을 선물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지치거나 힘든 마음이 드는 밤에 깊고 짙은 밤하늘에서 우리도 별빛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의 삶에도 찬란한 빛을 어둠에서 발견하는 순간을 선사하는 에드바르 뭉크의 깊은 위로를 느껴봅시다.
이 작품은 여자가 누워있는 남자에게 몸을 기대고 얼굴을 그의 목에 묻고 뱀파이어처럼 물고 있는 듯하기도 하며 키스를 나누어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작품 또한 뭉크의 주된 주제인 욕망과 죽음의 양면성을 표현합니다. 열정의 파괴적인 힘과 정서적, 영적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치명적인 매력을 담고 있습니다. 뭉크의 강렬한 색상과 분명한 명도의 사용은 정서적 몰입을 높이는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긴 머리를 한 여성이 머리카락과 함께 양팔로 깊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 열기도 느껴집니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양면성을 깊게 담아내는 작품이 자주 보입니다. 뜨거운 사랑과 뜨거운 아픔. 깊은 아픔과 깊은 사랑. 뭉크는 강렬하게 느끼고 아파하는 밀도 높은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우리도 때때로 무엇인가를 강하게 열망하거나 아파하곤 합니다. 그 순간에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을 전하는 강렬한 양면성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패러디와 광고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깊은 감정을 생생한 이미지와 강렬한 표현을 통해 원초적인 인간의 감정을 그려 내었기 때문 아닐까요? 인간의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것들의 양면성을 그려내는 뭉크의 작품들로 우리 삶의 복잡성을 탐색하고 더 깊게 이해하는 성찰, 공감과 위로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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